[파인만 양자역학] 2-6. 철학적 함의(Phylosophical implications)
[참조]차교수의 물리 산책: 파인만 양자역학 2장/[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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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 양자역학을 내맘대로 번역하고 약간의 해설을 달아 봤습니다. 한글 해석과 덧붙인 [주]는 저의 개인적인 생각 이므로 그대로 받아 들이진 말아 주세요. 하지만 칭찬, 동의, 반론, 지적등 어떤 식으로든 의견은 환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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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The relation of wave and particle viewpoints)
2장. 파동과 입자 관점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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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 양자역학을 내맘대로 번역하고 약간의 해설을 달아 봤습니다. 한글 해석과 덧붙인 [주]는 저의 개인적인 생각 이므로 그대로 받아 들이진 말아 주세요. 하지만 칭찬, 동의, 반론, 지적등 어떤 식으로든 의견은 환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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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The relation of wave and particle viewpoints)
2장. 파동과 입자 관점의 차이
2–6. Philosophical implications
2-6. 철학적 함의(Phylosophical implications)
Let us consider briefly some philosophical implications of quantum mechanics. As always, there are two aspects of the problem: one is the philosophical implication for physics, and the other is the extrapolation of philosophical matters to other fields.
양자역학이 가지는 철학적 함의를 간략하게 집어 보자. 늘 그랬던 것처럼 질문에는 양면이 있다. 먼저 물리학에 담긴 철학적 의미와 그 다음으로 [물리학 이외의] 다른 영역에 철학적 의미와 상관성이다.
When philosophical ideas associated with science are dragged into another field, they are usually completely distorted. Therefore we shall confine our remarks as much as possible to physics itself.
과학과 관련된 철학적 개념(idea)이 다른 영역으로 끌려 들어 가면서(drag into ~) 딴판으로 왜곡되곤 한다. 따라서 우리의 논의를 물리학의 영역에 힘껏 붙잡아 둬야 한다.
First of all, the most interesting aspect is the idea of the uncertainty principle; making an observation affects the phenomenon. It has always been known that making observations affects a phenomenon, but the point is that the effect cannot be disregarded or minimized or decreased arbitrarily by rearranging the apparatus.
먼저, 가장 흥미를 끄는 측면은 관찰(observation)이 현상(phenomenon)에 영향을 미칠 거라는 불확정성 원리의 개념이다. 관측하는 것으로 현상[발현]에 영향을 미친다고 들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요점은 그 영향이라는 것이 [측정] 장치들을 재배치 하는 것으로 없앤다거나 최소화 시키거나 임의로 줄일 수 없다는 점이다.
[관측으로 인해 결과가 바뀐다고 하지만 관측 방법(장치의 재배치)을 바꾼다고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관측이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은 유효한가?]
When we look for a certain phenomenon we cannot help but disturb it in a certain minimum way, and the disturbance is necessary for the consistency of the viewpoint. The observer was sometimes important in prequantum physics, but only in a trivial sense.
우리가 어떤 현상을 관찰할 때 영향을 최소화 하긴 하겠지만 피할 수는 없고 일관된 관점을 위해서는 이런 '개입'은 필수다. 양자물리학 이전에(pre-quantum) 관찰자는 때로 매우 중요했으나 대개 무시되곤 했다.
The problem has been raised: if a tree falls in a forest and there is nobody there to hear it, does it make a noise? A real tree falling in a real forest makes a sound, of course, even if nobody is there. Even if no one is present to hear it, there are other traces left. The sound will shake some leaves, and if we were careful enough we might find somewhere that some thorn had rubbed against a leaf and made a tiny scratch that could not be explained unless we assumed the leaf were vibrating. So in a certain sense we would have to admit that there is a sound made.
이런 문제를 상정해보자. 숲에서 나무가 쓰러졌으나 그것을 듣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쓰러지는] 소리가 났었다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나무는 쓰러졌고 소음도 일었지만 듣는이가 아무도 없었을 뿐이다. 그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더라도 다른 흔적(traces)은 남아 있다. 자세히 살펴 보면 가시(thorn)가 나뭇잎을 비벼서(rubbed) 작은 상처(scratch)를 냈는데 그 상처는 나뭇잎을 흔렸기 때문이라는 이유말고는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소음이 났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We might ask: was there a sensation of sound? No, sensations have to do, presumably, with consciousness. And whether ants are conscious and whether there were ants in the forest, or whether the tree was conscious, we do not know. Let us leave the problem in that form.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소리의 감응[소리에 대한 반응]이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추측컨데 감응은 인지했을 때 일어난다. 만일 숲어딘가에 있던 개미가 인지했을 지도 모를 지언정 우리는 인지하지 못했다. 이제 이 문제는 그대로 놔 두자.
Another thing that people have emphasized since quantum mechanics was developed is the idea that we should not speak about those things which we cannot measure. (Actually relativity theory also said this.) Unless a thing can be defined by measurement, it has no place in a theory. And since an accurate value of the momentum of a localized particle cannot be defined by measurement it therefore has no place in the theory. The idea that this is what was the matter with classical theory is a false position. It is a careless analysis of the situation. Just because we cannot measure position and momentum precisely does not a priori mean that we cannot talk about them. It only means that we need not talk about them.
또다른 문제는 양자역학이 대두되자 사람들은 우리가 측정할 수 없는 것은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상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상대론도 이에 동조했었다.) 측정(관찰)로 실체를 정의할 수 없다면 이론이 설 자리는 없다. 입자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기에 운동량의 정확한 값을 측정할 수 없으므로 이론이 성립할 여지가 없다. 이 생각이 바로 고전물리학이 어긋나게된 문제의 지점이다. 상황에 대한 분석이 세심하지 못했다. 그저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점이 우리가 논의할 수도 없다고 말하는 가장 우선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언급할 필요가 없을 뿐이다. [특정 할 수 없다는 점을 만하지 말고 현상은 인정하자.]
The situation in the sciences is this: A concept or an idea which cannot be measured or cannot be referred directly to experiment may or may not be useful. It need not exist in a theory. In other words, suppose we compare the classical theory of the world with the quantum theory of the world, and suppose that it is true experimentally that we can measure position and momentum only imprecisely. The question is whether the ideas of the exact position of a particle and the exact momentum of a particle are valid or not.
과학계의 상황은 이랬다. 실험으로 직접 측정될 수 없는 개념 또는 생각은 유효하지도 않고 유효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이론으로 존재할 필요도 없다. 달리 말하면, 고전물리 이론이 통하는 세계와 양자이론의 세계를 비교한다고 해보자. 우리가 위치와 운동량을 개략적으로 만 실험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해보자. 이때 해야할 질문은 입자의 정확한 위치와 정확한 운동량이 있다는 생각이 유효한지 또는 아닌지다. [양자현상은 있으나 위치와 운동량을 각각 특정할 수 없다고 불확정성 원리라는 생각을 부정할 일은 아니다.]
The classical theory admits the ideas; the quantum theory does not. This does not in itself mean that classical physics is wrong. When the new quantum mechanics was discovered, the classical people—which included everybody except Heisenberg, Schrödinger, and Born—said: “Look, your theory is not any good because you cannot answer certain questions like: what is the exact position of a particle?, which hole does it go through?, and some others.”
고전 이론에서는 그렇게 [실험으로 입증되어야 한다고] 받아들였고 양자이론은 그러지 않았다. 고전물리학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새로 양자역학이 등장 했을 때 하이젠버그, 슈뢰딩거 그리고 보른을 제외한 대부분 고전역학계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봐라, 당신들 이론이 제대로 된게 없어. 당신들은 입자의 정확한 위치 조차 대답하질 못하잖아? 입자가 어느 구멍으로 통과 했는지 알아? 그외에도 한둘이 아니지."
Heisenberg’s answer was: “I do not need to answer such questions because you cannot ask such a question experimentally.” It is that we do not have to.
하이젠버그의 대답은 이랬다. "당신들은 그 의문을 실험적으로 제시하지 못했으니 나는 그 질문에 답할 필요가 없군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면 않되는 질문이다.
Consider two theories (a) and (b); (a) contains an idea that cannot be checked directly but which is used in the analysis, and the other, (b), does not contain the idea.
(a) 와 (b)라는 두개의 이론이 있다고 해보자. (a)라는 이론은 즉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분석(해석)의 과정에서 활용될 수 있고, 다른 이론 (b)는 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a)라는 이론에 담긴 개념을 설명 할 수 없기 때문에 틀렸다고 주장한다. 실체를 직접 확인할 수 없는 개념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If they disagree in their predictions, one could not claim that (b) is false because it cannot explain this idea that is in (a), because that idea is one of the things that cannot be checked directly.
만일 두 이론의 예측이 일치하지 않다면 (a)라는 이론에 담긴 개념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b)라는 이론이 틀렸다고 주장하면 않될 것이다. 그 개념도 직접 설명 될 수 없는 여러 개념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It is always good to know which ideas cannot be checked directly, but it is not necessary to remove them all. It is not true that we can pursue science completely by using only those concepts which are directly subject to experiment.
어떤 개념은 직접 확인될 수 없다는 것을 늘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모두 제거할 필요는 없다[어떤 개념이 직접 확인 할 수 없다고 해서 깡그리 무시될 필요는 없다는 점을 필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실험으로 직접 확인될 수 있는 개념만이 우리가 추구할 과학이라고 여기는 것은 옳지않다.
In quantum mechanics itself there is a probability amplitude, there is a potential, and there are many constructs that we cannot measure directly. The basis of a science is its ability to predict. To predict means to tell what will happen in an experiment that has never been done. How can we do that?
양자역학 스스로 확률 진폭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고, 가능성을 말하며 직접 확인할 수 없지만 여러 구성들[입자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들]을 가지고 있다.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은 과학의 기본이다. 예측이란 이제까지 없었던 어떤 일이 벌어질지 실험으로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By assuming that we know what is there, independent of the experiment. We must extrapolate the experiments to a region where they have not been done. We must take our concepts and extend them to places where they have not yet been checked.
실험으로 얻어지지는 않았더라도 이전에 있었던 경험을 취합하자. 이제까지 없었던 영역으로 실험을 추론해 봐야한다. 개념을 꼭 쥐고 아직 검증되지 않은 영역으로 확장해야 할 것이다.
[경험을 토대로 사고실험을 해보자. 고전 물리학의 이론들이 양자 현상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틀렸다고 말하지 말자. 고전 물리학의 파동 이론과 통계 이론을 가지고 사고실험을 통해 양자현상을 설명해보자.]
If we do not do that, we have no prediction. So it was perfectly sensible for the classical physicists to go happily along and suppose that the position—which obviously means something for a baseball—meant something also for an electron. It was not stupidity. It was a sensible procedure.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측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고전물리학자들은 위치의 의미가 야구공이나 전자나 다를바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이런 생각은 어리석지 않다. [야구공의 위치를 계산하는 법칙을 전자에 적용하는] 이런 대입은 일리있다.
Today we say that the law of relativity is supposed to be true at all energies, but someday somebody may come along and say how stupid we were. We do not know where we are “stupid” until we “stick our neck out,” and so the whole idea is to put our neck out. And the only way to find out that we are wrong is to find out what our predictions are. It is absolutely necessary to make constructs.
오늘날 우리는 상대성 법칙이 모든 에너지에 적용된다고 하는데 언잰가 누가 나타나 우리가 참 어리석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우리는 숨이 넘어가기 전까지 우리가 바보였다는 사실을 깨닳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믿고있는 모든 사상에 목을 메고있다. 우리가 잘못알고 있다는 것을 깨닳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예측하려는 것이 무었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We have already made a few remarks about the indeterminacy of quantum mechanics. That is, that we are unable now to predict what will happen in physics in a given physical circumstance which is arranged as carefully as possible.
우리는 앞서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원리)에 대해 몇가지 언급했다. 그것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세심히 정립되어온 물리학[고전 물리학]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현재로서는 확실치 않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미시 세계의 현상을 양자역학으로 설명하려 한다. 보이는 자연현상을 세밀히 관찰한 끝에 신중히 정립되어 온 고전 물리학과 상충될 것인지 아직 알 수 없다.]
If we have an atom that is in an excited state and so is going to emit a photon, we cannot say when it will emit the photon. It has a certain amplitude to emit the photon at any time, and we can predict only a probability for emission; we cannot predict the future exactly. This has given rise to all kinds of nonsense and questions on the meaning of freedom of will, and of the idea that the world is uncertain.
만일 흥분상태[전자가 에너지를 얻어 바깥 궤도로 올라간 불안정 상태]에 있는 원자는 이내 광자를 방출할 텐데 언재 광자를 방출할 것이라고 특정할 수는 없다. 단지 언재든 광자를 방출할 [확률]진폭이 있는데 이를 방출 확률로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적확하게 예측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점이 자유의지과 세상은 불안정 하다는 생각의 의미에 관한 수많은 오해와 의문을 낳았다.
Of course we must emphasize that classical physics is also indeterminate, in a sense. It is usually thought that this indeterminacy, that we cannot predict the future, is an important quantum-mechanical thing, and this is said to explain the behavior of the mind, feelings of free will, etc. But if the world were classical—if the laws of mechanics were classical—it is not quite obvious that the mind would not feel more or less the same.
물론 고전물리학 역시 불확정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어느정도 인정해야 한다. 미래를 완전히 예측할 수 없는 불확정성이 양자역학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 이면서 자유의지의 느낌같은 마음 내키는 대로 취하는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세상이 고전적 이라면, 말하자면 역학 법칙이 고전적 이라고 해서 [인간의] 생각도 별 차이가 없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히 아니다.
It is true classically that if we knew the position and the velocity of every particle in the world, or in a box of gas, we could predict exactly what would happen. And therefore the classical world is deterministic.
우리가 세상의 혹은 상자안의 입자들의 위치와 속도룰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무슨일이 일어날지 확실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은 고전물리학적으로 맞다. 고로 고전적 세상은 결정론적이다.
Suppose, however, that we have a finite accuracy and do not know exactly where just one atom is, say to one part in a billion. Then as it goes along it hits another atom, and because we did not know the position better than to one part in a billion, we find an even larger error in the position after the collision. And that is amplified, of course, in the next collision, so that if we start with only a tiny error it rapidly magnifies to a very great uncertainty.
하지만 유한한 정밀도, 그러니까 십억개 중 한개 정도의 원자에 대해 [위치나 속도를] 모른다고 가정해보자. 그 원자가 다른 원자와 충돌하면 우리가 십억분의 일의 오차보다 더 정확히 위치를 모르니까 충돌 후 위치에 더 많은 오차를 구해낼 것이다. 그리고 연속된 충돌로 인해 그 오차는 점점더 커져 처음에는 아주 작은 오차로 시작했으나 이내 엄청난 불안정성을 유발하며 급히 증가할 것이다.
[유한한 정밀도: 오차가 꼭 있어야 한다. 정밀도가 무한하다면 오차가 0일 수도 있고 세상은 정확히 예측 가능할 수도 있다.]
To give an example: if water falls over a dam, it splashes. If we stand nearby, every now and then a drop will land on our nose. This appears to be completely random, yet such a behavior would be predicted by purely classical laws. The exact position of all the drops depends upon the precise wigglings of the water before it goes over the dam. How?
예를 하나 들어보자. 댐에서 물이 넘쳐 떨어지고 있다고 하자. 우리가 그 옆에 서있다면 물방울이 우리의 코위로 틈틈이 튈 것이다. 물방울은 전적으로 무작위로 튀겠지만 순전히 고전적인 법칙으로 예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물방울의 정확한 위치는 물의 정확히 어떻게 댐을 넘쳐 요동치는 가에 달렸다. 어떻게?
The tiniest irregularities are magnified in falling, so that we get complete randomness. Obviously, we cannot really predict the position of the drops unless we know the motion of the water absolutely exactly.
아주 미미한 불규칙성은 [물이] 떨어지며 증폭되어 완전히 무작위적이 양상을 띄게 될 것이다. 물의 움직임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한 확실하게 물방울의 위치를 확실히 예측할 수 없다.
Speaking more precisely, given an arbitrary accuracy, no matter how precise, one can find a time long enough that we cannot make predictions valid for that long a time.
더 높은 정밀도를 따진다면, 얼마나 정밀할 것인지 중요치 않다, 유효한 예측을 할 수 없을 만큼 아주긴 시간이 걸릴 것을 안다.
Now the point is that this length of time is not very large. It is not that the time is millions of years if the accuracy is one part in a billion.
이때 요점은 이정도의 시간동안은 아주 긴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정밀도를 십역분의 일로 잡아도 백만년이나 되진 않을 것이다.
The time goes, in fact, only logarithmically with the error, and it turns out that in only a very, very tiny time we lose all our information.
사실 시간이 흐르며 오차는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한다. 그리고 아주아주 짧은 시간내에 우리가 가진 정보를 모두 잃게된다.
If the accuracy is taken to be one part in billions and billions and billions—no matter how many billions we wish, provided we do stop somewhere—
만일 정밀도를 수십억, 수백억, 수천억분 혹은 원하는 만큼 그 이상 큰 값 분의 일로 잡더라도, 언잰가는 멈춰야 하는 [유한한] 정밀도를 취한다 해도
then we can find a time less than the time it took to state the accuracy—after which we can no longer predict what is going to happen!
정밀도를 설정한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을 내에 우리가 더이상 예측이 불가능해 지는 시간을 알아낼 수 있다.
[아무리 작은 확율의 불확정성을 설정해 놓더라도 아주짧은 시간내에 이로부터 증폭된 오차로 인해 예측 불가하게 된다.]
It is therefore not fair to say that from the apparent freedom and indeterminacy of the human mind, we should have realized that classical “deterministic” physics could not ever hope to understand it, and to welcome quantum mechanics as a release from a “completely mechanistic” universe.
따라서 표면적인 자유도와 고전적인 "결정론적" 물리학이 이를 [양자역학/불확정성] 이해할 거라는 희망을 버리고 "완벽히 역학적인" 우주에서 나온 거라며 양자역학을 환영하고픈 인간의 심정을 함께 논하는 것은 정당치 않다.
For already in classical mechanics there was indeterminability from a practical point of view.
이미 고전역학에서도 실제로 불확정성을 인정하고 있으니까.
[양자역학이 등장하여 우주의 섭리를 설명할 듣한 기세지만 고전역학을 무시하지 말자. 양자역학을 설명하기 위해 고전역학의 이론들이 동원되었다. 고전역학에도 불확정성은 있었다. 다만 해석의 단순화를 위해 무시했었을 뿐이다.]
미시세계에서 관찰이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장비의 문제가 아니라 내재적인 성질이어서 관찰하는 행동을 양자역학 이론에 포함시킵니다. 반면에 거시세계에서는 관찰과는 상관없이 물리량들 사이의 관계많으로 자연법칙이 만들어지지요.
답글삭제'관찰이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미시세계에 '내재된 성질' 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언뜯 받아들이기 쉽지 않군요. 강의가 계속되면 자연 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길 바래봅니다.
삭제excited state 을 물리에서는 들뜬 상태라고 부릅니다. 전자가 존재할 수 있는 여러 상태 중 가장 낮은 에너지 상태가 바닥 상태(ground state)이고 에너지가 그 보다 더 높은 상태는 모두 들뜬 상태이어요.
답글삭제'흥분'이 아니라 '들뜬' 이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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