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1]
What news! How much more important to know what that is which was never old!
'새소식'이란 무얼까? 절대 낡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 New(새로움)와 Old(낡음)의 대비. 시간이 흘러도 항상 새롭다는 '고전' 같은 것
“Kieou-pe-yu (great dignitary of the state of Wei) sent a man to Khoung-tseu to know his news.
'위'나라의 최(great)고위인사(dignitary)인 거페유(?)가 그(공자)의 최근 소식을 알고 싶어 공추(?공자)에게 사람을 보냈다.
(이하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내용이라 함, Analects,XIV)
Khoung-tseu caused the messenger to be seated near him, and questioned him in these terms:
공자가 사자를 그의 근처에 앉히도록(be seated) 지시하고(cause)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What is your master doing?
너의 주인이 어찌 지내느냐?
The messenger answered with respect:
사자가 공손히(with respect) 답했다.
My master desires to diminish the number of his faults, but he cannot come to the end of them.
저의 주인님은 그의 허물을(faults) 줄이기(diminish) 위해 애쓰고 계십니다(desire to~). 하지만 그는 그목표에 도달할 수 없을 겁니다.
The messenger being gone, the philosopher remarked:
사자가 돌아간 후에 철학자가 한마디 했다.
What a worthy messenger! What a worthy messenger!”
참 가치있는(좋은) 사자로다.
The preacher, instead of vexing the ears of drowsy farmers on their day of rest at the end of the week,—for Sunday is the fit conclusion of an ill-spent week, and not the fresh and brave beginning of a new one,—with this one other draggletail of a sermon, should shout with thundering voice,—”Pause! Avast! Why so seeming fast, but deadly slow?”
목사는 일요일은 허투루 보낸(ill-spent) 한주에 걸맞는(fit) 결론이고 신선(fresh)하고 과감한(brave) 새로운 한주의 시작은 아니기 때문에(for) 칠칠치 못한(draggletail,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여인) 설교(sermon)를 가지고 한주의 마지막날 끝자락에 졸리운 농부의 귀를 성가시게 하는(vexing) 대신에 "서라! 중지하라(avast)! (but=only) 그렇게 느리면서 왜 그리 급한척 하느냐?"라며 천둥같은 목소리로 소리쳐야 했었다(The preacher~<>should shout~, 가정법임, 일요일 설교는 지루하다).
Shams and delusions are esteemed for soundest truths, while reality is fabulous.
진실이 엄청난(fabulous) 동안 수치와 속임수(delusion)들이 단단히 바른 것처럼 여겨졌다(be esteemed).
If men would steadily observe realities only, and not allow themselves to be deluded, life, to compare it with such things as we know, would be like a fairy tale and the Arabian Nights’ Entertainments.
인간이 오직(steadily 지속적으로)진실을 추구해 왔다면(observe) 그리고 자만하는 것(themselves to be deluded, 스스로 착각되다)을 허용하지 않았다면, 삶(life)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현재의 암담한 현실)과 비교하여 동화 속 이야기(행복한 결말) 또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여흥 같았을 것이다.
If we respected only what is inevitable and has a right to be, music and poetry would resound along the streets.
만일 필수 불가결한 것 만을 추구하고(respect)-겸손하게 살아왔다면- 옳게 살았더라면(a right to be) 음악과 시가 거리에 올려 퍼졌을 것이다.
When we are unhurried and wise, we perceive that only great and worthy things have any permanent and absolute existence,—that petty fears and petty pleasures are but the shadow of the reality.
우리가 서두르지 않고(unhurried, 조급해 하지 않고) 현명(wise) 하다면 우리는 하찮은 두려움과 즐거움(일희일비)는 그저 진실의 그림자에 불과할 뿐(but=only)이며 오직 위대하고 가치있는 것이 영속적이고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 인지(perceive)한다. .
This is always exhilarating and sublime. By closing the eyes and slumbering, and consenting to be deceived by shows, men establish and confirm their daily life of routine and habit every where, which still is built on purely illusory foundations.
이것은 항상 들뜨고(exhilarating) 멋지다(sublime, 숭고한). 눈을 감고 선잠에 빠짐(slumbering)으로서, 보여주기(show)에 기만 당했다(be deceived)는 데 수긍(consenting, 서로 동의) 함으로서 인간은 그들의 일상과 관습이 가공의 토대에 세워진(사상누각) 여기저기에서 확립(establish and confirm)한다.
* 사상누각을 세워 놓고는 나만 바보가 아니라면서 암묵적으로 서로 동의함
Children, who play life, discern its true law and relations more clearly than men, who fail to live it worthily, but who think that they are wiser by experience, that is, by failure.
인생을 연기하는(play)-소꿉놀이- 어린이들은 (인생의)진실된 법칙을 가치있게 살기에 실패한, 경험, 그러니까 실패를 통해 현명해진다고 생각하는 성인 성인보다 더 명확히 구분한다.
* 아이들의 소꿉놀이는 순진하고 명쾌하다. "아푸니까 청춘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따위의 경험을 많이 했다는 어른들의 말은 과연 기만 인가? 아니면 독려의 말인가?
* 아이들의 소꿉놀이는 순진하고 명쾌하다. "아푸니까 청춘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따위의 경험을 많이 했다는 어른들의 말은 과연 기만 인가? 아니면 독려의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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